미국에서 거의 30년간 사형수로 수감됐던 남성이, 자신을 가둔 핵심 증거인 치아 자국 감정이 법정에서 신뢰를 잃으면서 지난해 11월 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AP 통신에 따르면 이 남성은 짐 듀컨(Jimmie Duncan)으로, 1998년 당시 여자친구의 23개월 된 딸을 성폭행하고 욕조에 빠뜨려 살해한 혐의로 1급살인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검찰은 피해 아동의 몸에 남은 치아 자국, 법치의학에서 교흔이라고 부르는 흔적이 듀컨의 치아와 일치한다는 감정을 유죄의 핵심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틀로 찍어 만든 교흔

이 감정은 미시시피의 법치의학자 마이클 웨스트(Michael West)와 병리학자 스티븐 헤인(Steven Hayne)이 맡았습니다. 그런데 듀컨의 변호를 맡은 비영리 법률단체 이노센스 프로젝트(Innocence Project)가 법원에 제출한 영상에는 웨스트가 듀컨의 치아를 본뜬 틀을 아이의 몸에 직접 강하게 눌러 교흔을 만들어 내는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모른 채 법정에 선 다른 전문가는 그 교흔이 듀컨의 치아와 일치한다고 증언했고 이것이 유죄 판결의 결정적 근거가 됐습니다.

지난해 4월 루이지애나주 4구역 지방법원의 앨빈 샤프 판사는 새로 제출된 전문가 증언을 근거로 유죄 판결을 뒤집었습니다. 법정에 선 법치의학 전문가 애덤 프리먼은 교흔 감정의 전제 자체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며 이를 근거 없는 과학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재판부는 아이의 사망이 성폭행과 살해가 아니라 우발적인 욕조 익사로 보인다는 판단도 함께 내렸습니다. 수감자 증인의 진술 철회와 1심 당시 변호인의 부실한 조력 문제도 함께 제출된 증거에 포함돼 있었습니다.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이 치아 석고 모형을 들고 라이트박스에 놓인 피부 흔적 사진과 비교하는 모습
법치의학 감정실에서 치아 석고 모형과 피부에 남은 흔적 사진을 라이트박스 위에 놓고 비교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 AI 이미지

30년 만에 받은 보석

지난해 11월 듀컨은 15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루이지애나주 앙골라 교도소에서 풀려났습니다. 보석 심리에는 피해 아동의 어머니이자 당시 듀컨의 연인이었던 앨리슨 레이턴 스테이섬이 증인으로 나섰습니다. 그는 딸이 경련 질환을 앓고 있었다며 "제 딸은 살해당한 게 아닙니다. 아파서 숨진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검찰은 유죄 판결을 다시 세우겠다며 상고했고 루이지애나주 대법원이 이 사건을 심사하고 있습니다. 사형 집행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해 온 리즈 머릴 루이지애나주 검찰총장도 보석 석방에 반대했습니다.

오래전부터 흔들린 교흔 감정의 신뢰

웨스트와 헤인이 함께 작업한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두 사람의 감정은 최소 10건의 다른 오판과 연결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시시피에서는 르본 브룩스와 케네디 브루어가 각각 어린 소녀를 살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가 수십 년이 지나서야 DNA 검사로 무죄가 밝혀졌습니다. AP 통신이 2013년 진행한 자체 조사에서는 2000년 이후 교흔 감정이 근거가 된 오판과 오기소 사례가 최소 24건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헤인은 2020년 사망했고 웨스트는 DNA 검사 도입으로 교흔 감정이 쓸모없어졌다고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맡았던 다른 사건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흐린 하늘 아래 법원 건물 외벽에 세워진 정의의 저울을 든 조각상
법원 건물에 세워진 정의의 저울 조각상을 담은 사진. AI 이미지

한국에서도 치아 자국을 범인 특정의 근거로 쓰는 감정은 낯설지 않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따르면 법치의학 감정 업무는 1968년, 변사체에 남은 교흔을 그대로 떠내 용의자의 치아를 석고로 본떠 맞춰 보는 방식으로 처음 쓰였습니다. 이때 세운 방법, 곧 피해자 몸의 흔적과 피의자 치아의 석고 모형을 맞대어 보는 방식은 지금 미국에서 신뢰를 잃은 교흔 감정과 근본 원리가 같습니다.

다만 미국처럼 교흔 감정 자체의 과학적 타당성을 공개적으로 따져 묻고 그 결과로 오래된 유죄 판결이 뒤집힌 사례는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 감정법이 지금도 쓰이는지, 쓰인다면 어떤 기준으로 신뢰도를 검증하는지에 대한 논의 자체가 아직 없다는 것이 지금 한국의 사정입니다.